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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글씩산산조각난 신: 어느 태평양 전쟁 귀환병의 일기



우연히 읽은 책인데, 누군가 저보다 먼저 수기를 올렸기에 여기에 인용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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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와타나베 기요시는 열다섯살에 제국해군에 입대하여 여러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결국 참패로 끝난 레이테 해전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 뒤 자신이 타고있던 전함 무사시가 가라앉을때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생존자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에 그는 이제 막 스무살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귀향한 45년 9월부터 1946년 4월까지의 일기를 1977년에 '산산조각 난 신'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천황이 갑자기 신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성전의 제일가는 상징에서 민주주의의 애매하기 짝이없는 상징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폐쇄적인 교육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자면.. 

1. 와타나베가 1945년 9월 초에 귀향할 때 그의 어머니는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군에서 횡령한 물자를 챙겨오지 않고 빈손으로 온 것에 대해 타박했다고 합니다. 어쨋든 그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참여한 '성전'의 의미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천황이 적의 전함에서 처형되거나 이를 피하기 위해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함께 귀향한 대부분의 동료 병사들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천황이 당장 자살하지 않는것은 패전의 혼란이 가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런데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어도 천황이 죽기는 커녕 자진해서 맥아더를 방문하지 않나, 총리였던 도조는 자살인지 쇼인지 모를 뻘짓을 하질 않나.. 게다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억옥쇄를 외치던 신문들이 느닷없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다'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데 그렇게 우정이 중요하다면 애초에 전쟁은 왜 한 것인가? 천황을 비롯하여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1억 총참회는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와타나베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갑니다. 10월 중순이 되자 와타나베는 울분에 찬 나머지 황성을 불태우고 천황을 매달아 자기가 군에서 당했듯이 구타하는 상상을 할 지경이 됩니다.

4. 11월이 되자 신문에 새로운 복장을 입은 천황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는 이 복장이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새 옷을 지어 입었다는 것 자체가 천황이 체포될 일도 없거니와 퇴위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 12월이 되자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기로 결심합니다. 이제 다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12월 중순, 그는 자신을 '군대 떨거지'라 비웃는 야쿠자 다섯명과 싸워 크게 다칩니다.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누워있으면서 그는 다시금 무사시에 올라와 18인치포로 일본 열도를 향해 포탄을 갈겨대는 꿈을 꿉니다. 

6. 12월 21일, 요코스카에서 온 지인이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스트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책 두권을 주고 가는데 그는 이 책들을 소중히 여겼으며 이 책들이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일기에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많은 모양인데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7. 그 와중에 천황의 '인간선언'이니 '신년칙사'니 하는 것들이 발표되면서 와타나베의 천황에 대한 증오심은 이제 그 극을 달립니다. 

도대체 천황 이외에 다른 누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단 말인가? 자신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어찌 감히 국민들에게 도덕적 생활 운운할 수 있는가? 옛 봉건영주들은 성이 함락당하면 책임을 졌다. 또한 모셨던 상관들도 배가 격침당하면 책임을 졌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의 방송이나 1946년 1월 1일의 칙사에서 천황은 '미안하다' 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신문에서는 맥아더가 천황이야말로 일본 민주화의 지도적 인사라고 하는데 진정한 민주화는 오로지 인민만이 이루어 내는 것이며 그렇기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규 교육은 중학교까지밖에 받지 못한 전 천황 숭배자는 분노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8. 한편 와타나베는 예전엔 귀축미영을 몰살해야 한다고 떠들던 동네 아저씨가 이제는 일본이 미국의 마흔 아홉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을 보고 천황뿐 아니라 자신이나 이웃들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9. 이즈음 그의 눈을 뜨게 한 진정한 스승인 가와카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으며 일기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지함이다' 라고 적었습니다. 

10. 2월 초 GHQ가 발표한 천황가의 재산공개를 보고 이제까지 천황가와 재산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적이 없던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침략전쟁' 임을 깨달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책임을 묻습니다. 자신이 실은 지금까지 중국 민중의 피를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얻기 위해 수백만 명의 전우들이 죽거나 다치고 조국은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는 생각에 와타나베는 '학문이니 예술이니 문화니'하는 것들에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11. 이즈음 중국 전선에서 돌아온 나이든 퇴역군인이 자신이 중국에서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그다지 후회하는 기색도 없이 얘기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천황의 모습이 바로 그 군인의 모습이 아닐까? 

(전략) 상해에서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그렇지, 20명 가량의 중국인을 베었지.. 이 반지도 그때 얻은거야.. 그러니까 거간꾼 같은 것보다 훨씬 수지가 맞는거야(후략) 

12. 3월, 그는 젊은 일본인 여성과 길을 가던 미군 병사와 서로 길을 비켜주지 않으려다 주먹다짐을 벌입니다. 분에 찬 채로 집에 돌아왔지만, 이내 일본인들의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일본군에 맞서기도 했던 필리핀 여성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13. 1946년 4월 20일, 그는 새 직업을 찾기위해 고향을 떠나 도쿄로 향하면서 이젠 누구라도 천황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향을 떠나기 전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예전엔 꿈도 꿀 수 없던 호칭인 '당신(아나타)'이란 말로 천황을 지칭했으며, 더는 당신을 믿을 수도,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고 썼습니다. 이어 제국 해군에서 그가 받은 봉급 명세서, 그 외에 복무기간 중에 받은 모든 관급품, 식비관련 목록을 적고는 봉급과 물품의 총액을 4281엔 5센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는 편지에 4282엔을 동봉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빚진 건 아무것도 없소'



출처 : 오늘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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