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

하루한글씩싼티이야기2

싼티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여기저기 나뒹구는 살림살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금 울었는지 엄마의 눈가가 빨갰지만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싼티가 얼른 집안 정리를 도왔지만 모녀는 서로 말이 없었다. 곧 저녁밥상이 차려지고 싼티는 혼자 식사를 마친뒤 식탁을 정리했다. 엄마가 식사를 거르는 건 흔한 일이라 그녀는 거기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낮에 타라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글자를 쓰던 작은 손과 나뭇가지, 그리고 싼티라는 나의 이름. 누운채로 손을 들어올려 캄캄한 허공에 그 글자를 적어본다. 팔을 내리고 눈을 몇 번 껌벅였다. 다시 허공에 이름을 적어본다. 또다시 캄캄한 허공을 응시하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주 오래 전에 엄마가 책을 읽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흰종이에 검게 인쇄된 글씨는 가지런히 줄을 맞춰 배열되어 있었다. 글자 한 개 한 개는 아무렇게나 줄기를 뻗친 식물같기도 하고 벌레 같기도 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아이는 엄마의 책읽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때의 엄마 얼굴은 평화롭고 행복해보였다. 어린 소녀에게 따뜻함을 남긴 기억이란 그것뿐인 것 같았다. 아빠와 함께한 기억은 적다. 어린 싼티는 아빠가 집에 돌아올 때면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조여들었었다. 아빠는 늘상 불쾌한 표정이었다. 맘에 안드는 일에 대해 말로 표현하는 일은 적었지만 온몸에서 아내에 대한 불만과 미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히 그는 자기 아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일 때면 신경질을 부렸고, 그 표현은 점점 더 과격해져갔다. 싼티엄마가 책을 읽는 일은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다. 아빠는 가끔 술냄새를 풍기며 다른 여자와 함께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그런 날의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했다. 일부러 자기 아내에게 보란 듯이 더한 표현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날은 엄마와 싼티가 함께 자는 날이다. 이런 일은 어린 싼티가 생각해도 부당한 일로 느껴졌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래도 마음이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던지 어린 아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로 가끔씩 한숨을 토하곤 했다.그 한숨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깊은 절망감만큼은 어린 마음에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싼티의 엄마는 엄마로서나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만을 다할 뿐 아이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랑을 준 적이 없었지만, 오직 엄마만이 자기 세계의 전부인 아이로서는 엄마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이 되어 함께 왔던 여자가 아침일찍 떠나고 나면 또다시 평소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서로간에 아무 말도 없이 엄마는 식사를 준비하고 아빠는 외출 준비를 했다. 말없이 식사하고 말없이 외출하는 모습이 늘 하던대로의 평소와 같았고 가족 모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매일의 그 무겁고도 우울한 공기에 적응되었는지 어린 싼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일들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됐다. 과거를 더듬던 타라의 기억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바로 그 때에까지 이르렀다.

싼티가 유아티를 한참 지났을 때부터 아빠는 무슨 다른 일을 시작했는지 몰라도 매일이 아닌 가끔씩 집에 들어오곤 했다. 집안의 공기는 이전보다 가벼워졌고 엄마는 가끔 간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했다. 그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바깥에서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소심한 성격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는 그 날만큼은 흥분되고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날은 덥지 않았지만 햇살은 따스했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날씨만큼이나 좋은 기분이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정말로 오랜만에 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다녀왔니? 오늘 재미있었니?” 늘상 무표정이던 엄마가 자기를 반가워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오자 아이의 마음에 자신감이 스며들었다. 책을 읽는 엄마의 옆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는 가지런히 정돈된 검은 글씨들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려본다.

너도 책 읽어보고 싶어?” 엄마의 물음에 아이는 일순 표정이 어두워졌다. 책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화내던 아빠의 험악한 표정과 그 답답한 공기가 다시 아이의 가슴을 누르는 듯 하다. 엄마는 아이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왔다.

책을 읽으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 읽어줄까?” 아이는 탐탁치 않지만 약간의 기대가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손에 들린 책은 어린애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책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다른 짧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얘기 또 해줄까?” 아이가 적극적인 몸짓을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번에는 우스운 얘기다. 아이는 활짝 웃더니 엄마에게 말했다.

다른 얘기 또 해줘요.” 엄마는 싼티에게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신기하고 황홀한 얘기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모녀는 잠시간 눈을 맞췄고 아이는 책장을 넘기던 엄마의 손가락을 잡아봤다. 그 손은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싼티야. 글자를 배워보지 않을래? 글자를 알면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주지 않아도 이런 재미있는 얘기들을 맘껏 읽을 수 있어. 네 이름도 쓸 수 있고. 어때?”

싼티의 동의하에 그렇게 공부가 시작되었다. 대신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싼티는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게까지 엄마에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서 본 엄마는 사랑스럽고 재밌었고 예뻤다. 싼티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단 몇일이 지나고 나서 그녀가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끔찍한 날이 왔다. 아이는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일이 자랑스러웠다. 종이가 빽빽하도록 자기 이름을 여러번 크게 적었다. 엄마는 간식을 준비하러 갔다. 한참을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거운 공기가 가슴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그 느낌에 고개를 드니 아무 소리도 없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아빠가 돌아왔다. 주변을 모두 얼릴 듯한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눈과 코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싼티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 보고 있던 그는 곧장 이 되바라지고 처신이 불량한 여자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싼티는 불안감에 의자에서 내려와 자기 아버지가 사라진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불길한 예감으로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온몸이 돌처럼 굳은 아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여자의 가녀린 신음소리와 쿵쿵대는 신경질적인 발소리와 조절되지 않는 호흡으로 씩씩대는 소리가 한데 엉켜 들려왔다. 아름다운 엄마는 얼굴에 피가 터져 흐르는 채로 악마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오고 있었다. 악마의 왼손에는 싼티의 엄마가 붙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가장 큰 식칼이 들려 있었다. 악마에게 잡혀있던 엄마의 오른손이 싼티의 이름으로 가득 적힌 종이 위에 내려쳐친 후 곧 식칼은 굉장한 기세로 바람가르는 소리를 내며 엄마의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엄마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괴한 비명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악마에게 잡혀있는 손목이 꺾이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제서야 악마는 피를 내뿜으며 파들파들 떨리는 엄마의 손을 놓아주었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칼을 쥔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려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그는 무언가를 묻는 듯이 눈썹을 올려 눈을 크게 뜨며 오른손의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큰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녀 사이에 몇 초간의 대치가 있은 후, 비명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이 잔인한 광경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피가 낭자한 장면이 본능적인 불쾌감을 주었을지언정 이 상황 자체가 문제라거나 잘못됐다는 인식은 없는 듯했다. 몇몇은 쓰러진 엄마와 그 곁의 소녀에게 충고의 말을 했지만 대부분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고 고개를 내젓고는 자기들끼리 험담을 하며 되돌아갔다. 그 사이 흥분이 가라앉은 것인지 악마는 싼티에게는 아무 해꼬지도 하지 않고 간단히 자기 짐을 챙겨서 나갔다. 그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잘린 손가락을 감싸쥐고 울부짖는 엄마의 곁에서 그저 자리를 지켜주는 수밖엔 없었다. 잠시후에 족장부부와 치료사가 집에 들어왔다. 몇가지 약초와 헝겊을 준비해온 치료사는 엄마의 상처를 살펴보고 처치를 했다. 그 동안 족장부부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아까 나간 악마를 칭찬하며 편들고 엄마를 나무라던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참담한 모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부족장은 먼저 자리를 뜨고 그 아내는 남아서 치료사가 작업을 마치기까지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치료사가 돌아간 후 부족장의 아내는 차를 끓여서 싼티와 엄마에게 마시도록 했다.

좀 너무하긴 했네만 어쩔 수가 있나. 그 사람이 얼마나 행실도 착하고 바른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런 착한 사람의 비위도 못 맞춰서 이런 일을 당하나. 자네 바깥사람도 정말로 오래 참았네. 여자가 너무 배운 것도 그렇지만 좀 배웠다고 남편 무시하고 함부로 하면 안되는게 아니겠나. 여자가 학교다니면서 배우는 것부터가 엄청 잘못된 일이지. 자네 부모 생각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도 질서라는 게.......어머머.”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일어선 엄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가벼운 목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족장의 아내가 눈이 똥그래지며 불쾌한 표정으로 엄마를 흘겨보았다. 숨을 씩씩대던 그녀는 아직도 할 말이 남은건지 남아있는 싼티에게 계속해서 못된 말을 했다.

저거 봐라. 학교에 다닌 여자들이 저렇게나 건방지다. 넌 니 아빠가 나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잘못하는 일이 훨씬 더 크다. 여자가 시집오기 전부터 바깥으로 나돌면서...”싼티도 그녀의 엄마가 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목례도 하지 않았다. 분통이 터진 족장아내의 목소리가 방문을 뚫고 들어왔다.

에미나 딸이나 똑같구만! 그따위로 행동하니 딸년도 저렇게 키우지! 너 같은 건 당해도 싸다 싸! 내가 누구야! 내 남편이 족장이야! 망할년아!”

싼티는 침상에 쓰러진 엄마곁에 앉아 그 목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이나 더 상스러운 욕을 하던 족장의 아내는 씩씩거리며 집에서 나갔다. 싼티의 집 밖에서 몰래 훔쳐보던 동네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족장 마누라의 살찐 등을 보며 수군거렸다. “. 지도 지주제파악을 못하네. 몸팔던 첩년 주제에 어디다가 훈수를 둬. 족장마누라는 무슨. .”

싼티의 엄마는 그 일이 있고나서 며칠을 끙끙 앓았다. 작은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치료가 잘못됐던 것인지 상처부위는 부어오르고 전신에 열이 났다.

엄마, 괜찮은거야?” 몇 번을 물어봤지만 들은건지 정신이 있는 건지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치료사가 몇 번 살피러 왔지만 그다지 걱정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빨갛게 된 엄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줄 뿐이다. 이틀 정도 지나자 열이 내리고 이제 위험은 넘긴 것 같아 안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싼티야. 네가 싼티니? 엄마는 어디 있어?”눈물을 글썽이며 묻는 그 분은 자기가 싼티의 외할머니라고 했다. 함께 온 좀더 젊은 여자가 짐을 내려놓을 동안 외할머니는 자기 딸을 찾아 방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딸에 대한 걱정과 반가움과 기대로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가. 어디가 아프냐.”

“.......”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 끝에 비명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할머니는 누워있는 엄마 위로 엎드려 토하듯이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엄마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지만 역시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출처 : 오늘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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