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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글씩[초단편 문학카페] 11. 황혼


황혼
 
 
 
   노인은 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몹시 창백한 안색을 띠고 있었는데 줄곧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찼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날이 저물도록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나는 노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평생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호프만 교수였는데 철저한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안색이 무척 불편해 보이십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주저 말고 말씀하십시오.”
 
   노인은 두려운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야.”
 
   그는 분명 도움이 필요한 모습이었다. 나는 슬며시 그의 곁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굉장히 겁에 질려 계십니다. 무슨 일을 겪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노인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결심을 굳힌 듯 그는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나는 누구보다 현세적인 사람이었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고 학문적으로 입증된 사실만 인정했지. 사후세계나 내세 따위는 나에게 어디까지나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에 불과했어.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믿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확신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하루는 면분이 없는 낯선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일부러 먼 곳에서 왔다고 말했지. 나는 그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 그는 굉장히 박학다식한 사람이었고 그와 같이 해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그가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
 
   ‘선생께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사후의 일에 관하여 묻는 것이오.’
 
   나는 단호한 어투로 딱 잘라 대답했어.
 
   ‘사후의 일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일세.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그저 고깃덩어리일 뿐 아무것도 되지 않아. 다시 말해 죽으면 끝이라는 말이네. 어쭙잖은 추측으로 사후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쓸데없는 시간 낭비요, 얼간이들이나 일삼는 짓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지.
 
   ‘여보시오, 죽어보지도 않고 어이 그리 장담하는 것이오?’
 
   그 말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타이르듯이 대답했어.
 
   ‘구태여 죽어보지 않고도 능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사후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만물은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일세. 반면 사후세계나 사후의 일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매우 간단한 이치지.’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그러더니 두 눈을 번뜩이며 매섭게 쏘아붙이듯이 말했지.
 
   ‘선생의 말은 저급한 궤변일 뿐이오! 우물 안에서 고개를 들어보았자 얼마나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겠소?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보았자 어디 하늘이 가려지오? 인간의 눈만큼 욕망에 뒤덮여 혼탁한 것이 또 없거늘 그러한 도구로 진리를 보는 것이야말로 가당치 않은 소리오. 결국 보지 못해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지금부터 내 모습을 한번 잘 보도록 하시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별안간 백골로 변하더니 비단을 찢는 듯이 높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어. 창검에 베인 양 마디마디에 칼자국이 드러나기도 했고 전신이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지.
   그러는가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다가도 돌연 사지가 토막 나기도 했어. 결국에 가서는 흉측한 뱀으로 변해 밖으로 사라져버렸지.”
 
   노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몇 마디 말을 덧붙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내 사후의 모습이었어. 지옥에서 죄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고 나면 나는 아마 뱀으로 다시 태어나겠지. 평생토록 바닥을 기며 독이 묻은 혓바닥이나 날름거릴 과보인 것을, 지금껏 무얼 그리 안다고 세간이 미혹되게 떠들어댔는지 학자로 살아온 지난날들이 몹시 후회스러울 뿐이네.”
 
   황혼이 드리운 하늘 아래 백발의 노신사는 쓸쓸히 멀어져갔다.




출처 : 오늘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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